“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거동 못할 정도 돼야 ‘아프다’ 여겨”

뜻밖의상담소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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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이 말하는 ‘번아웃’ 사례 



타인에 대한 헌신을 덕목으로 삼아
스스로의 아픔 공개적 언어화 어려워
자기 희생 계속되면 그만 둘 수밖에
단체·조직의 활동 차원에서도 손해
성폭력 등 피해자 돕는 활동가들은
오랜 투쟁 중에 트라우마 전이되기도 


양여옥씨(38)는 ‘인권재단 사람’의 배분지원팀에서 일하는 공익활동가다. 처음 활동가로 발을 내디딘 건 2006년이다. 소규모 평화운동 단체에서 시작했다. 초기에는 활동비도 없이 의욕과 열정으로 버텼다. 나중에 활동비가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알바’를 병행해야 했다. 만 10년이 되던 해 고비를 맞았다. 연차가 쌓이다 보니 책임이 무거워지고, 스트레스가 커졌다. 반면 경제적으로는 월세도 내기 힘든 처지였다. 스스로가 무능하게 느껴졌다. 잠을 못 이루고 끼니를 거르기 시작했다. 사람들 만나기도 두려워졌다. 행사장에 가야 하는데 식은땀이 나고 주저앉을 정도였다. 우울증이었다. 단체 활동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구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 상담 일을 시작했다. 트레이닝을 받고 위기에 빠진 이들을 상담하면서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돌아보게 됐다. ‘힘들었는데 몰랐구나, 내가 나를 돌보지 못했구나.’ 2년가량의 회복 기간을 거쳐 올해 다시 활동가로 돌아왔다.

전형적 ‘번아웃’을 겪은 양씨는 이제 다른 활동가들을 돕고 있다. ‘2019 활동가 이야기주간’을 맞아 지난 5일 ‘활동가 건강곡선 그리기 워크숍’을 열었다. 양씨를 포함해 7명이 모였다. “동료들이 너무 자주 아프고, 몇은 세상을 떠났다” “같이 활동하던 친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죽음이 개인적 차원인지 고민하게 됐다” “10년 넘게 활동하다 아파서 쉰 지 1년 반 정도 됐다. 돌아오고 싶은데 이전 삶으로 되돌아가는 게 옳은지 고민된다” “주변에 젊은 활동가가 거의 없다. 시민사회 전반적으로 활동가가 줄어드는 것 같다”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건강을 위한 대안으로는 △4대보험과 최저임금 △안식월·안식년·유급휴가 △상담 지원 △치유를 위한 시간·비용 지원 △조직문화 점검 등을 꼽았다.

어떤 직군이든 오래 일하다 보면 번아웃에 빠질 수 있다. 그럼에도 공익활동가들의 번아웃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이들의 직업적 특성 때문이다. 공동체와 타인에 대한 헌신을 덕목으로 삼는 만큼, 스스로의 아픔을 공개적으로 언어화하기 어렵다.

양씨는 “활동가들은 아파서 거동하지 못할 정도가 돼야 비로소 ‘아프다’고 여긴다. 그래서 아프다고 말할 때쯤 되면 활동을 그만두거나 쓰러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있어야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자신을 갈아넣고 희생하면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다. 단체·조직의 활동·운동 차원에서도 손해”라고 했다.


성폭력·국가폭력 등의 피해자를 돕는 활동가들은 또 다른 고충에 시달린다. 일종의 ‘감정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가 전이되기도 한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39)은 상담 자체보다 ‘싸움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의 무게가 더 크다고 말한다. “성폭력 사건이 소송으로 넘어가면 3년, 5년씩 걸린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생계수단이 넉넉지 못한 경우도 장기간 맞서 싸워야 한다. 피해자에게 회복의 시간이 찾아오는 대신 스트레스와 생활고가 계속될 때 지원하는 활동가들도 고통스럽고 무력감에 사로잡힌다”고 말했다. 2005년 상근활동을 시작했던 김 부소장도 번아웃 경험자다.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2010년 사표를 냈다. “소진됐다고 느꼈다.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이후 서울 은평지역에서 마을활동 등을 하다 2017년 복귀했다.

권위주의적 조직문화도 번아웃 요인
개인과 조직의 분리 어려운 활동가들
조직이 욕 먹을까봐 문제 제기 않기도
각 단체에서 활동가들 현장 보내기 전
스트레스 관리 등 ‘자기보호’ 교육 필요

권위주의적 조직문화도 번아웃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익명을 요구한 활동가 ㄱ씨(44)는 과거 활동했던 단체와 관련해 “평등한 네트워크 조직을 표방했지만, 윗선에서 의사결정을 하면 아랫선에서 따라가는 식으로 운영됐다”고 말했다. 그는 커리어를 ‘권력’으로 활용하는 인사에게 인격모독적 언사를 듣기도 했다. 사과를 받지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는 이유다. ㄱ씨는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던 동료의 사례도 전했다. 이 동료는 조직 내 전문가와 갈등을 빚었다. 해당 전문가가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자 활동가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심리치료까지 거쳐야 했다. ㄱ씨는 “활동단체들은 평등하다는 외관 아래 갈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차라리 갈등의 실체를 인정하고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진임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소장(36)도 조직 내 소통 문제를 언급했다. “활동가들은 조직 내부의 소통이나 민주주의 문제를 외(부)화시키기 어렵다. 개인과 조직의 분리가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우리 조직이 욕먹겠지?’ 같은 자기검열 기제가 작동한다.”

비수도권 지역 활동가들의 실태는 더 열악하다. 이진홍 익산희망연대 사무국장(47)은 “상근활동가가 1~2명뿐인 소규모 단체가 많다. 한 사람이 쉬면 단체의 활동이 멈춰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국장은 “20~30대 활동가가 유입되지 않는 상황에서 후속세대가 생겨나길 바라며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상담심리전문가 김지연씨(35)는 활동가들을 상대로 심리상담을 진행한 경험이 많다. 김씨가 만난 활동가들은 대체로 ‘과노동’ 상태다. 맡고 있는 역할 자체가 다양하고, 근무시간이 정확하지 않으며, 주말과 휴일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다. ‘진단되지 않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 불면이나 분노에 시달린다. 그는 활동가들이 맨몸으로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면서 ‘자기보호의 기술’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각 단체에서 활동가들이 처음 들어오면 스트레스 관리법 같은 교육을 한 뒤 현장에 내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익활동가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일과 건강을 맞바꾼다면, 그걸 방치해선 안된다. 자신을 위해 일하든, 타인을 위해 일하든 건강권은 기본권이다.”(김지연씨)


◆정보공개센터, 활동가의 능동성 부여 위해 ‘노동시간 줄이기’

활동가의 건강권 모색하는 단체들

심리상담사 ㄱ씨는 대기업에서 사내 상담사로 일하는 동안 기업의 인력관리가 얼마나 철저한지 실감했다. 회사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멈춰 직원이 잠시 갇히는 사고만 발생해도 상담사가 투입돼 상담을 진행했다.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정작 기업보다 더 ‘사람’을 중시해야 할 시민사회단체들은 공익활동가의 건강을 개인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질병의 개인화’로 인해 활동가들은 아프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조기에 치료를 받았다면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을 이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활동을 중단하는 사태가 빚어지곤 했다. ‘쉼’과 ‘채움’이 없는 삶은 새로운 활동가의 진입을 막는 걸림돌로도 작용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한 일부 단체들이 최근 몇 년 사이 활동가 건강권을 위한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활동가의 건강 없이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대표적 단체가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정보공개센터)다.


성폭력상담소, 정신적 외상 방지 위해
1회 상담시간 제한, 소진 예방 프로그램
동행·인권재단 사람·아름다운재단 등
활동가 재충전 지원 재단·기관도 늘어


2008년 창립한 정보공개센터는 공공기관에 대한 정보공개 실태 조사·연구와 언론 캠페인 등을 통해 공공기관의 투명성·책임성을 높이는 일을 목표로 하는 단체다. 상근활동가 6명을 두고 있는데, 이 중 5명이 정보공개센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상근 기간이 다른 단체에 비해 긴 편이다. 활동가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11년 전 창립 때부터 일해온 정진임 소장(36)은 “초기부터 임원진 사이에서 ‘활동가들이 전문가로서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했다”고 말했다. 단체의 규모가 커지면 활동가가 변호사·의사 등 전문가들의 ‘서포터’로 전락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경계하자는 취지였다. 창립 초기부터 활동가들에게 사전 결재 없이 업무를 진행한 뒤 사후 보고토록 하는 등 능동성과 책임성을 부여했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환경에 대한 논의도 계속됐다. 2014년부터 노동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 2시 퇴근제로 시작해 격주 금요일 출근제로 이어졌다. 한 주는 4일, 한 주는 5일 근무하는 식이었다. 2015년부터는 완전한 주 4일제로 전환했다. 3년 일하면 한 달 쉬는 안식월, 6년 일하면 1년 쉬는 안식년도 도입했다. 정 소장은 “공익활동 역시 노동이다. 이 노동이 노동으로 존재하고, 활동가들이 직업군으로 인정받고, 제도적으로 안전장치 안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경우 상담사들의 정신적 외상을 방지하기 위해 1회 상담시간을 제한하는 등의 장치를 두고 있다. 소진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과 개인상담도 진행한다. 이와 별개로 만 3년 근무하면 근속휴가 2주일을 쓸 수 있도록 하고, 활동가들의 생활형태에 따른 유연근무제도 도입했다.

활동가들의 휴식과 재충전을 지원하는 재단·기관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공익활동가들의 사회적협동조합인 ‘동행’에서는 2016년부터 재충전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꾀하기 어려운 활동가들에게 주로 여행경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공모를 통해 올해 9월까지 모두 112명에게 7500만원을 지급했다. 여진 사무처장은 “한 대안학교 교사들은 이 사업을 통해 처음으로 전체 워크숍을 다녀왔다며 좋아하더라”고 전했다. 여 처장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데 공익활동가들의 역할이 컸다”며 “이들이 적절한 휴식과 충전을 통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권재단 사람’은 인권 분야 활동가를 대상으로 재충전 프로젝트 ‘일단, 쉬고’를 진행하고 있다. 활동가 스스로 기획한 여행·취미활동 프로젝트를 1인당 100만원, 팀당 200만원까지 지원한다.

공익활동단체의 설립과 사업을 지원해온 ‘아름다운재단’도 2002년부터 공익활동가 쉼 지원사업을 해오고 있다. 1인당 200만원, 팀당 600만원까지 지원하며 지금까지 56개 그룹과 개인 195명이 혜택을 받았다.


(경향신문, 2019-11-23)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911230600115/?s_code=af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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