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아침 7시 30분 동네 친구와 희망뚜벅이 28일차에 함께 하기 위해 길을 나섰어요. 개성 만점의 수제 피켓을 들고 전철을 타니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는데 무심한 눈길 사이 궁금해하는 얼굴도 있어요. 피켓을 보며 손전화를 움직이는 게 꼭 ‘김진숙의 희망뚜벅이’를 검색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이기를 바라는 저의 기대가 투사된 걸 수 있지만요.
* 동네 친구들과 함께 만든 피켓 ⓒ단비
떠나기 전부터 여러가지 마음이 들었어요. 김진숙씨는 거의 축지법의 경지로 빨리 걷는다는데 잘 따라갈 수 있을지, 항암치료를 하고 있다는데 중단해도 괜찮은건가 걱정하는 마음부터 ’그는 어떻게 그렇게 웃으며 걷고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올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 2009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복직을 권고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복직이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상식에 대한 의구심 등 여러 갈래 마음을 품고 길을 나섰어요. 동네 친구와 청와대 앞에서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며 노숙 단식농성을 40일 넘게 하는 이들의 간절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성환역에 도착, 출발지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근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 피켓을 보고 눈인사를 건넵니다. 쌍용자동차 조합원분들이네요. 천안에서 평택역까지 걷는 일정이라 오시겠구나 예상했지만 버스에서 만나니 더 반가워요.
천안명가 호두과자에 내리니 많은 분들이 모였어요. 노동조합 조끼를 입으신 분들이 많은데 여기저기 혼자 오신 분들도 눈에 띕니다. 두리번대며 찾는데 아, 저기 작업복 차림에 모자를 쓴 모습, 사진으로만 봤던 그가 햇살같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아마도 피켓이겠지요) 보더니 걸어오는데 아이돌을 만난 찐팬 마냥 심장이 두근거려요.
* 환한 미소로 다가오는 김진숙씨를 보며 두근두근 ⓒ이창우
“안녕하세요, 저흰 인천에서 왔어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만든 피켓을 들고 전철타고 버스 타고 왔어요. 힘내세요!“
그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노동이 존중되는 세상으로 가는 길 맨 앞에서 우직하게 걷는 그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 그동안 무심했던 미안함, 35년 동안 그를 여전히 해고자로 투명인간으로 대하는 사회에 대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출렁입니다. 제 마음이 그와 공명하며 일으키는 파장의 울림이 피켓을 찬찬히 보는 그의 눈빛에도 일렁대는 것 같아 뭉클하면서 따스한 기운이 퍼집니다. 말없이 피켓을 보던 그가 자신의 부채(부산에서 청와대까지 34일동안 400km를 걷는 동안 손글씨로 구호를 쓴 부채를 피켓 삼아 들고 걸어 부채요정으로 불리웠어요)를 보면서 ‘아, 너무 휑한데 비교된다’며 웃습니다.
그와 눈 맞추며 함께 한 이 순간으로 희망뚜벅이에 온 목적은 이루었어요. 그냥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강화가 고향인 그에게 인천 시민의 마음이 포개지면 좋겠다 싶어서 마을모임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함께 피켓을 만들어 마음을 전하니 저도 조금 더 깊은 숨이 쉬어집니다. 현장에서 함께 하는 ’마음의 연대‘는 그런 힘이 있어요.
버스에서 만난 쌍용자동차 조합원 중 한 분과 같이 걷는데 ‘김진숙씨와 한진중공업에 부채감이 있다며 시간을 내서 희망뚜벅이에 함께 하고 있다”고 해요. ‘2009년 쌍용차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막아냈다면 2011년 한진중공업의 해고가 없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투쟁에서 지면서 그때부터 우리 사회에 정리해고가 진행된 것 같다”고 하시는데 제 심장이 쿵하니 떨어지는 것 같아요.
쌍용자동차는 2009년 976명이 정리해고된 후 해고자와 그 가족 등 3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지금도 손해배상가압류의 고통과 헬기까지 동원한 폭력적 진압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2020년 5월, 10년 11개월만에 마지막 복직자가 현장에 돌아갔고, 반년만에 또 위기에 놓인 상황인데 부채감이라니, 그 마음의 무게가 잘 가늠되지 않았어요. 해고가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을, 가정을 파괴하는 끔찍한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느끼는 미안함, 안타까움이겠지요. 그래서 고통을 먼저 겪은 이가 고통에 처한 이를 공감하는 마음의 연대가 이어지는 거겠지요.
* 억울함으로 인한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통을 먼저 겪은 이가 고통에 처한 이를 공감하는 마음의 연대가 이어지는 거겠지요 ⓒ이창우
사실 김진숙님을 잘 알지는 못해요. 2011년, 높이 35M의 부산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하는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들이 ‘희망버스’로 수차례 오고 가는 동안 뉴스에서만 봤어요. 희망버스에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이 컸고 모쪼록 무탈하기를 기도했지요. 그리고 11월 해고자 전원 복직을 합의하고 크레인에서 내려온 그의 활짝 웃는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열 달을 하늘에 매달려 싸운 사람이 저렇게 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니 나와는 다른 경지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당시 그가 복직자에서 제외되었다는건 잘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 미안했고 정년을 앞둔 그의 복직 투쟁을 무조건 지지하고 싶었어요. 물론 그의 걸음걸음이 어찌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겠어요. 강산이 서너번도 더 변한 35년간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함이겠지요. 부산에서 3명으로 출발한 희망뚜벅이가 수백 명이 되고 서울로 들어서며 일 천 명이 되었어요. 암투병을 하는 그가 자신의 아픔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아픔을 큰 산처럼 품고 이끌고 가는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 김진숙씨가 자신의 아픔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아픔을 큰 산처럼 품고 이끌고 가는 모습은 숭고해보였어요 ⓒ이창우
2월 7일 청와대로 향한 김진숙님의 희망뚜벅이 마지막 여정은 동료 상담자와 함께 걸었어요. 해고노동자들, 비정규직노동자, 장애인, 산업 재해로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불안정한 노동현실에 미래가 불안정한 청년, 여성, 이 땅의 차별받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이니 청운동 사무소 앞이 광화문 광장 같더군요. 노동 존중의 사회는 어디에 있냐는 그의 물음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데 그의 시그니처 마무리 구호, ‘웃으면서 함께 끝까지 투쟁!‘에 목이 매여요. 일주일 사이 더 검게 그을리고 작아진 얼굴의 주름에 배인 고되고 지난한 시간이 느껴져서요. 모쪼록 자신의 복직과 노동존중세상의 희망을 일구려는 희망뚜벅이 여정이, 함께 모인 마음들이 그에게 투병과 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울컥거리는 마음을 마주하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어요. 피켓 사진을 찍는 것 같았는데 몇 정류장 지나 내릴 때 제게 와서 부드럽게 속삭이더군요. ‘힘내세요!’ 참 뜻밖의 경험이었어요. 낯선 이에게 힘내라는 말을 듣다니. 그는 제 슬픔과 먹먹함을 알아봤던 걸까요? 희망뚜벅이를 다녀오며 공감이라는 에너지의 공명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이창우 화백님의 그림을 사용하였습니다.
1월 31일 아침 7시 30분 동네 친구와 희망뚜벅이 28일차에 함께 하기 위해 길을 나섰어요. 개성 만점의 수제 피켓을 들고 전철을 타니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는데 무심한 눈길 사이 궁금해하는 얼굴도 있어요. 피켓을 보며 손전화를 움직이는 게 꼭 ‘김진숙의 희망뚜벅이’를 검색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이기를 바라는 저의 기대가 투사된 걸 수 있지만요.
* 동네 친구들과 함께 만든 피켓 ⓒ단비
떠나기 전부터 여러가지 마음이 들었어요. 김진숙씨는 거의 축지법의 경지로 빨리 걷는다는데 잘 따라갈 수 있을지, 항암치료를 하고 있다는데 중단해도 괜찮은건가 걱정하는 마음부터 ’그는 어떻게 그렇게 웃으며 걷고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올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 2009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복직을 권고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복직이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상식에 대한 의구심 등 여러 갈래 마음을 품고 길을 나섰어요. 동네 친구와 청와대 앞에서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며 노숙 단식농성을 40일 넘게 하는 이들의 간절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성환역에 도착, 출발지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근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 피켓을 보고 눈인사를 건넵니다. 쌍용자동차 조합원분들이네요. 천안에서 평택역까지 걷는 일정이라 오시겠구나 예상했지만 버스에서 만나니 더 반가워요.
천안명가 호두과자에 내리니 많은 분들이 모였어요. 노동조합 조끼를 입으신 분들이 많은데 여기저기 혼자 오신 분들도 눈에 띕니다. 두리번대며 찾는데 아, 저기 작업복 차림에 모자를 쓴 모습, 사진으로만 봤던 그가 햇살같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아마도 피켓이겠지요) 보더니 걸어오는데 아이돌을 만난 찐팬 마냥 심장이 두근거려요.
* 환한 미소로 다가오는 김진숙씨를 보며 두근두근 ⓒ이창우
“안녕하세요, 저흰 인천에서 왔어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만든 피켓을 들고 전철타고 버스 타고 왔어요. 힘내세요!“
그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노동이 존중되는 세상으로 가는 길 맨 앞에서 우직하게 걷는 그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 그동안 무심했던 미안함, 35년 동안 그를 여전히 해고자로 투명인간으로 대하는 사회에 대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출렁입니다. 제 마음이 그와 공명하며 일으키는 파장의 울림이 피켓을 찬찬히 보는 그의 눈빛에도 일렁대는 것 같아 뭉클하면서 따스한 기운이 퍼집니다. 말없이 피켓을 보던 그가 자신의 부채(부산에서 청와대까지 34일동안 400km를 걷는 동안 손글씨로 구호를 쓴 부채를 피켓 삼아 들고 걸어 부채요정으로 불리웠어요)를 보면서 ‘아, 너무 휑한데 비교된다’며 웃습니다.
그와 눈 맞추며 함께 한 이 순간으로 희망뚜벅이에 온 목적은 이루었어요. 그냥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강화가 고향인 그에게 인천 시민의 마음이 포개지면 좋겠다 싶어서 마을모임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함께 피켓을 만들어 마음을 전하니 저도 조금 더 깊은 숨이 쉬어집니다. 현장에서 함께 하는 ’마음의 연대‘는 그런 힘이 있어요.
버스에서 만난 쌍용자동차 조합원 중 한 분과 같이 걷는데 ‘김진숙씨와 한진중공업에 부채감이 있다며 시간을 내서 희망뚜벅이에 함께 하고 있다”고 해요. ‘2009년 쌍용차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막아냈다면 2011년 한진중공업의 해고가 없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투쟁에서 지면서 그때부터 우리 사회에 정리해고가 진행된 것 같다”고 하시는데 제 심장이 쿵하니 떨어지는 것 같아요.
쌍용자동차는 2009년 976명이 정리해고된 후 해고자와 그 가족 등 3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지금도 손해배상가압류의 고통과 헬기까지 동원한 폭력적 진압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2020년 5월, 10년 11개월만에 마지막 복직자가 현장에 돌아갔고, 반년만에 또 위기에 놓인 상황인데 부채감이라니, 그 마음의 무게가 잘 가늠되지 않았어요. 해고가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을, 가정을 파괴하는 끔찍한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느끼는 미안함, 안타까움이겠지요. 그래서 고통을 먼저 겪은 이가 고통에 처한 이를 공감하는 마음의 연대가 이어지는 거겠지요.
* 억울함으로 인한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통을 먼저 겪은 이가 고통에 처한 이를 공감하는 마음의 연대가 이어지는 거겠지요 ⓒ이창우
사실 김진숙님을 잘 알지는 못해요. 2011년, 높이 35M의 부산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하는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들이 ‘희망버스’로 수차례 오고 가는 동안 뉴스에서만 봤어요. 희망버스에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이 컸고 모쪼록 무탈하기를 기도했지요. 그리고 11월 해고자 전원 복직을 합의하고 크레인에서 내려온 그의 활짝 웃는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열 달을 하늘에 매달려 싸운 사람이 저렇게 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니 나와는 다른 경지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당시 그가 복직자에서 제외되었다는건 잘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 미안했고 정년을 앞둔 그의 복직 투쟁을 무조건 지지하고 싶었어요. 물론 그의 걸음걸음이 어찌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겠어요. 강산이 서너번도 더 변한 35년간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함이겠지요. 부산에서 3명으로 출발한 희망뚜벅이가 수백 명이 되고 서울로 들어서며 일 천 명이 되었어요. 암투병을 하는 그가 자신의 아픔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아픔을 큰 산처럼 품고 이끌고 가는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 김진숙씨가 자신의 아픔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아픔을 큰 산처럼 품고 이끌고 가는 모습은 숭고해보였어요 ⓒ이창우
2월 7일 청와대로 향한 김진숙님의 희망뚜벅이 마지막 여정은 동료 상담자와 함께 걸었어요. 해고노동자들, 비정규직노동자, 장애인, 산업 재해로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불안정한 노동현실에 미래가 불안정한 청년, 여성, 이 땅의 차별받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이니 청운동 사무소 앞이 광화문 광장 같더군요. 노동 존중의 사회는 어디에 있냐는 그의 물음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데 그의 시그니처 마무리 구호, ‘웃으면서 함께 끝까지 투쟁!‘에 목이 매여요. 일주일 사이 더 검게 그을리고 작아진 얼굴의 주름에 배인 고되고 지난한 시간이 느껴져서요. 모쪼록 자신의 복직과 노동존중세상의 희망을 일구려는 희망뚜벅이 여정이, 함께 모인 마음들이 그에게 투병과 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울컥거리는 마음을 마주하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어요. 피켓 사진을 찍는 것 같았는데 몇 정류장 지나 내릴 때 제게 와서 부드럽게 속삭이더군요. ‘힘내세요!’ 참 뜻밖의 경험이었어요. 낯선 이에게 힘내라는 말을 듣다니. 그는 제 슬픔과 먹먹함을 알아봤던 걸까요? 희망뚜벅이를 다녀오며 공감이라는 에너지의 공명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이창우 화백님의 그림을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