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취지 : [활동가인터뷰]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나고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인터뷰 글 등록일 : 2020. 5. 11.
글쓴이 : 지윤. 당신을 만나 우리다워지는 아름다운 변화를 꿈꾸며, 神을 담은 흔적들이 마구 새어나오는 身들에게 감사하며, 지금 만나러 갑니다.
“자유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 _ 신영복 <처음처럼> 중에서
아지트가 있는 약수로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이는 어느 일요일 오후. <어쩌면사무소>로 향한다. 작년에 <더이음>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마음돌봄 워크숍을 진행한 김지연 상담심리사를 만나러 가는 길. 약속시간이 조금 남아 바로 앞 작은 공원에 앉아 햇볕을 쬐며 멍하니 바람을 맞는다. ‘아~좋다!’ 금세 약속시간. 첫 만남이 주는 설레임을 안고 활짝 열린 문안으로 들어선다.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탁자위에는 싱그러운 딸기샐러드가 놓여있고 그 옆에 각자 지금 딱 마시고 싶은 음료 두 잔이 향긋하게 놓인다. 몸이 기대고 있는 의자는 든든하고 공간은 아늑한데...뭔가 이상하다. 그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걸으면서 인터뷰 할까요?” ‘아차!’ 인터뷰라는 업무에 집중한 나머지 이제 막 상담을 마치고 여운이 남아있을 그녀를 놓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가 먼저 과감하게 산책을 제안해 준 덕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을 풀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만남을 이어간다.
어쩌면 사무소 전경. 앞으로 <뜻밖의 상담소>로 불릴거예요 (사진 : 김지연)
연결은 역시 <시골살이학교>
더이음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을까요?
<시골살이학교>* 출신입니다. 5~6년 전쯤? ‘서울에서의 삶을 유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고 ‘다른데서 살아보는건 어떨까?’ 생각하던 와중에 알게 됐어요.
*<시골살이학교> 시골살이에 필요한 정보, 지식, 자세, 경험, 기술을 두루 살펴보고 다양한 모습으로 시골살이 중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골에 사는 것이 특별한 삶이거나 도시를 탈출하는 부정적인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며 시골살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선택의 폭을 넓혀갈 수 있도록 2014년 지리산이음에서 시작한 프로그램.
※ ‘더이음’과 ‘지리산이음’은 이름도 비슷하고 함께하는 사람들도 다소 겹쳐 인연이 이어지기 쉬운 두 곳.
꿀맛이었던 시골살이학교 새참시간 (사진 : 김지연)
시간이 좀 흘렀는데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회사를 그만 뒀어요. 그때는 회사 생활을 접고 살아 갈 수 있을지 불안 했어요. 시골살이학교에서 만난 동기들 덕분에 뭔가를 만든다든지, 배운다든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됐던 거 같아요. “나도!” 하고 바로 뛰어든 건 아니고요. 이제까지는 직장 다니는 삶만 떠올렸다고 한다면, 회사 밖에서도 살 수 있겠다는 다른 가능성을 본 정도였어요. (그녀는 삼성전자 Life Coaching센터 전문상담사와 LG상사 심리상담실장 이력을 갖고 있다.)
비공식 또래상담이 떡잎이 되어
상담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어떤 측면을 얘기 하느냐에 따라 많은 얘기가 가능할 텐데요. 중학교 때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우연히 책을 통해 이 분야를 자세히 알게 됐어요. 『딥스: 자아를 되찾은 아이』라고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던 자폐아이의 치료 과정을 다룬 소설인데 인상적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때만해도 이 일이 직업으로 어떻게 연결될지는 알 수 없었어요. 심리학과가 있는 지도 몰랐고, 정보가 없었거든요. 이과생이었기 때문에 성적에 맞춰 취업이 잘되는 공대에 들어갔어요. 한창 스마트폰이 막 나올 때라 전자공학과는 빨리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고 취업이 결정된 이후 1년반 정도 듣고 싶은 과목을 들으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요. 그래서 평소 관심있던 심리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너무 재밌는거에요. 고민을 했죠. 주변에 진로를 바꿔보고 싶다고 이야기 했더니 학창시절 친구들이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학교 뒷산에서 야자 빼먹고 벤치에 앉아 친구들 고민을 많이 들어줬다면서요. 그러고 보니까 그랬더라고요. 그래서 1년 반동안 집중적으로 부전공을 후다닥해서 상담심리대학원으로 진학했고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어떤 분야의 상담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처음부터 성인상담에 관심이 있었어요. 학기 초에 교수님께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스포츠 선수를 상담하고 싶다고 했어요. 어느 구단에서 유망한 투수가 과도한 훈련으로 어깨가 나가는 일들이 있었는데 너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외국에서는 무리한 방식의 훈련이 아니라, 멘탈 관리를 포함한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야구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자기의 기량을 더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코치나 상담사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아예 없었어요. 일상 생활을 하는 성인에게 관심이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취업 준비할 때도 일반 회사에 지원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사회생활을 기업에서 시작하셨네요?
상담사들이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 처우가 굉장히 낮아요. 수련 과정에는 무급이거나 되려 돈을 내면서 하기도 하고요. 저는 사정상 졸업을 하면서는 완전히 독립을 해야했어요. 졸업하고도 전문가 자격을 따려면 4~5년 동안 꽤나 비용이 드는데 스스로 벌어서 하려면 보상이 중요했어요. 마침 그때 기업에서 심리상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람을 뽑기 시작했을 때였고, 기업 상담에 대한 저의 관심과 니즈가 잘 맞아 기업으로 가게 되었어요.
뭔가 착!착! 해 오신 것 같아요?
‘이걸 하고 나면 다음에 뭐를 하지?’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항상 두 가지 일을 하면서 꽉꽉 채워서 살았어요. 대학원 다니면서 과외하고, 논문 쓰면서 취업하고. 그러면서 시기에 맞게 해오긴 했지만 여러가지를 다양하게 경험하진 못했어요. 축제, 엠티, 동아리... 인간 관계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시기였는데 별로 못 즐겼거든요. 그때는 독립해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두 번째 직장을 다니면서 분석을 2년 정도 받았는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알게 됐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 둘 때는 분명한 상태로 결정할 수 있었어요. 물론 고민한 시간은 길었지만요. 지금은 불안정한 생활이지만 내가 얻고 있는 것에 좀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상담하는 활동가들을 만나다.
퇴사는 어떤 마음으로 결정하셨나요?
어릴때부터 아는 어머니 친구분이 있어요. 그 분이 오랫동안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먼저 보내드리고 남은 삶은 좀 편하게 살려고 밀양으로 이사를 갔는데 밀양 송전탑 사건이 터진 거에요. 그 마을에서는 젊은 사람이고, 신앙 생활을 오래 해오셔서 앞장 서서 싸우게 됐는데 힘드셨던 모양이에요. 잠도 못 주무시고 악몽도 꾸고 화도 많이 내게 되고... 그러면서 몸도 아프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제 기억속에서는 늘 쾌활했던 분인데, 이제 마음 편하게 살자고 시골로 갔는데 도대체 무슨일인가?’하고 걱정이됐어요. 마음만 동동 구르고 있었죠. 방법이 없을까하고.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하는 친구가 말하길, 자기 친구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며 치유 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하는데 와서 봐 달라는 거에요. 그 때 시작한 프로그램이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였어요. 정혜신 선생님을 처음 만났고 싸움의 현장에서 치유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엄마 친구 얘기를 했더니 <와락>**에서 치유활동 하시는 분들을 만나보라고 해서 갔고 거기서 와락치유단 선생님들을 만나게 됐어요.
치유는 상담실 밖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진 : 김지연)
와락치유단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심을 가지고 해고자 심리 치유를 해온 상담자, 치유자 그룹입니다. 와락치유단 선생님 중 한 분은 대한항공에서 부기장을 하다가 노조를 만들어서 해고당하고 상담 공부를 시작하신 분이기도 해요. 와락치유단 선생님들을 통해서 문제의식이 분명해졌어요. 마음건강은 개인이 감당하고 책임져야하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건강을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 목소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요. 치유자로서 상담을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병을 유발하는 불합리한 구조나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틈틈히 와락치유단 선생님들 연대에 따라다니다 저도 와락치유단 일원이 되었어요. 회사를 나오면서는 와락치유단에 오현정 선생님 등 몇몇 상담사 분들이랑 서울시 협치 <IT노동자 및 사회활동가 청년을 위한 심리지원>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퇴사해도 계속 일은 해온 셈이에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2013년 서울시의 심각한 자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치유 릴레이 프로젝트로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내 마음에 오롯이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 삶에 그런 사람 하나는 있어야지 않나. 엄마는 그런 사람을 상징적으로 부르는 말”의 의미를 담아 함께 따뜻한 밥상을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유 문화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마련한 프로그램.
**<와락>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심리상담을 진행해오던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와 해고 노동자 가족들이 함께 실직가정의 일상성 회복을 위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고문피해자 재단법인 ‘진실의 힘’, 3000여명의 시민들, 경기도, 평택시의 기금으로 2011년 설립한 심리치유센터.
조금씩 자기다워지는
어떤 것을 얻고, 집중하고 있나요?
큰 시스템에 있으면 맞춰야 되는 게 많은데 내 속도,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것에 맞는 삶을 디자인 해 보고 있어요. 아침 잠이 많아 출근시간 맞추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상담시간은 제가 잡기 나름이잖아요. 요즘엔 오전 11시 상담도 빠른 편이에요. 시간을 유용할 수 있다보니 하고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많이 해 보게 됐고요. 사람도 내가 편안한 관계 위주로 만나고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내가 편하니까 상담도 더 잘 되는 거 같아요.
잘 누리고 계신가요?
일을 벌리는 성격이라 제작년 서울시 협치 사업을 할 때는 숨가쁘게 느끼기도 했었어요. 프리랜서로 일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중이에요. 너무 일을 많이 벌리려고 할 때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예전에는 혼자 했다면 이젠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기도 하고요. 갑자기 잘 누리게 되었다던가 삶의 질이 높아졌다기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겪으면서 배우는 사람인 것 같아요. 해 보면서 팀작업 하는 것의 어려움이라던지,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가 맞지 않는다던지, 나에게 어떠한 한계가 있는지 등등 알아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나에게 무리인 건 정리하기도 하고요.
놓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죠?
괴로워서 놓기도 하고, 죽을 것 같아서 놓기도 하고요. 용기라고 말하니 대단해보이지만 자세히보면 ‘좌절감이 들어서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에요.
그냥 그렇게 과로사하기도 하죠. 생명을 놓기도 하고, 정서를 놓기도 하고, 소중한 걸 놓기도 하고.
상담사라는 직업은 나의 상태가 괜찮지 않으면 일을 못하니까요. 다른 사람 얘기가 귀에 잘 안들린다고 느껴질 때는 일을 쉬어요. 일을 시작할 무렵 한번 그랬던 적이 있는데 제 일상에 격동이 있다보니 듣는 일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 일을 하려면 나를 보호하는게 최우선일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떤 방식이 나에게 괜찮은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고 좋아지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어요.
상담과 교육의 교집합
그런 측면에서 보면 상담사는 행운이네요. 사람이 먼저인 것이 곧 일이 되잖아요. 모두가 자기상태를 최우선에 두는 게 당연한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맞아요. 상담 공부는 나를 계속해서 생각해야해요. 저는 분석을 받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지 그 전에는 몰랐어요. 자기 표현을 잘 못했고, 나를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일찍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10대 때 배웠으면 내 삶이 달라졌을텐데 아쉬울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점점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어려서부터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내 목소리가 인정되는 경험이 중요하니까요. <꿈틀리>*를 통해 알게된 덴마크식 교육이 매력적이었는데요. 학교 수업 시간에 계속 자기 표현을 해요. 짝을 지어서, 몸을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내가 어떤지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들으면서 구체적으로 대화해나가요. 덴마크에서는 10대 중반이 되면 국제정세에 대한 자기 견해나 어떤 사건에 대해 내 생각을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데요. 지식을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 할 수 있는 훈련이 된 것이지요. 내 생각, 내 감각, 내 방식을 말할 수 있고 존중받는 경험을 해서 가능한거지 싶어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한 달 간 지내다 오셨죠?
그러다 성인들을 위한 덴마크식 인생학교 <자유학교>**를 열게되었고, 그로 인해 인연이 생긴 국내 유일한 덴마크 전문 언론사 <NAKED DENMARK>***에서 <코펜하겐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진행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야기하다보니 프로그램 취지와 회사의 가치가 참 좋았어요. 단지 ‘덴마크가 좋다’라고 알리면서 환상을 파는 것을 지양하고, 한국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덴마크를 경험해본다는 취지가 맘에 쏙 들어서 가기로 결정했어요. 그쪽에서도 첫 프로그램이었다보니 아이디어도 보태고 참가자의 목소리에 맞게 수정도 해가면서 잘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글로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코펜하겐 한 달 살기> 경험을 글과 모임으로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부터 8주간 덴마크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소개하는 글 “어쩌면, 덴마크: 신뢰가 준 선물”을 온라인으로 배달하고 있으며 구독자들과 함께 지금, 여기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보는 오프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사진 : 김지연)
*<꿈틀리> 덴마크의 ‘에프터스콜레’를 적용하여 청소년들에게 1년간 옆을 볼 자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설계하고 나아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꾼이 되게 한다는 취지로 2016년 강화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를 베이스 캠프로 개교한 기숙형 대안학교인 <꿈틀리 인생학교>를 운영하는 사단법인.
**<자유학교> 행복한 인생을 찾아 덴마크 성인 대안학교 ‘폴케호이스콜레’에 다녀온 이들이 ‘쉼과 전환을 위한 안전한 실험실’을 목표로 꾸린 한국형 인생학교.
***<NAKED DENMARK>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손꼽히는 덴마크가 되기까지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을 제대로 보고 배움으로써 한국의 젊은 세대와 사회가 제3의 길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덴마크 소식을 가장 정확히 전하는 것을 표방하며 덴마크 호떡 노점 창업자, 코펜하겐에서 1년 살다 돌아온 언론인, 코펜하겐 한식당 총괄 매니저가 함께 덴마크와 한국을 연결하는 미디어 그룹.
****<코펜하겐 한 달 살기>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코펜하겐에서 한 달 동안 커뮤니티 숙소에서 함께 살며 덴마크가 행복 선진국으로 거듭난 비결을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가 행복하게 살아 갈 방도를 모색할 수 있도록 NAKED DENMARK팀이 기획, 운영하고 상담심리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설계한 프로그램.
활동가들과 함께
작년에 이곳에서 활동가들을 만나셨는데 어떠셨나요?
활동가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면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약하고 소외된 곳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싸워나가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를 치유해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활동하면서 마음이 손상될만한 일들이 많아요. 폭력적인 상황을 매일 보고 듣고 지원하면서 대리외상을 입거나, 때로는 혐오세력에 의해 직접 신체적인 폭력 또는 언어적인 폭력을 경험하고요. 외부적인 영향 뿐 아니라 ‘활동가라면 이런 걸 지켜야 돼. 이 정도는 견뎌야 해.’ 하며 스스로에게 압력을 주기도 해요.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해오신 분들은 소진이 오기도 하고요.
제가 가진 심리 지식을 나누고 싶었어요. 나를 돌보고, 몸을 이완시키고, 마음을 이해하고 대화해나가는 기술이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나게 되었죠. 짧게는 한두번 길게는 몇년간 심리적인 지지자로 만나고 있어요. 다들 자기만의 이유로 활동을 지속해나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데요. 그 과정을 함께 하고 있어요.
그녀와 만나고 싶다면
올해는 어떤 활동이 기다리고 있나요?
다음세대재단에 지원서를 제출했어요. 인권활동가를 위한 심리지원으로요. 회사 상담실에는 단계별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이 있어요. 신입사원들은 회사생활을 예상해볼 수 있는 영상을 보고 미리 어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지, 나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요. 간단한 이완 기술과 같은 스트레스 대처법도 배우지만 동기들끼리 서로 마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도록 관계도 형성하는 셈이에요. 입사한지 1년 정도 후에는 회사 다니면서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다시 가집니다. ‘스트레스 관리’ 또는 ‘적응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데, 중요한건 각 부서에서 동떨어져서 일에만 매몰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마음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고 연결시켜주는거에요. 일하는 정체성 뿐 아니라 다른 면면들을 만나고 이해하면서 회사생활의 삶의 질을 높이고 협업도 더 잘 이루어지도록 해요.
그 밖에 해외부서로 파견 나가기 전, 후 마음건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팀 단위에서 갈등이 있을 때 상호 이해를 돕는 심리워크숍을 하기도 하고요. 큰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연말에도 서로를 격려하고 관계 형성을 돕는 심리워크숍을 가져요.
활동가에게도 이러한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공익활동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대해 편하게 물어보고 이용 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해서 오현정 선생님, 이지연 선생님과 같이 <뜻밖의 상담소> 이름으로 지원서를 제출했어요. 여기를 기반으로 시작해서 마음 맞고 뜻맞는 상담사들도 더 함께하고 싶고요. 공익변호사 단체처럼 나중에는 그런 기관이 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요즘 위기 청소년들이 많아 대안학교들도 고민이 많아요. 제작년부터 <꿈틀리 인생학교>* 선생님들이랑 위기 청소년을 돕기 위한 공부를 해오고 있어요. 마음의 병에 대한 공부도 하고,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만들기 위한 준비도 하고요. 선생님들이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 어떤 반응은 하면 안되는지, 학교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등 같이 이야기해나가고 있어요. 올해부터는 학생들을 직접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꿈틀리 인생학교> 덴마크의 ‘에프터스콜레’를 적용하여 청소년들에게 1년간 옆을 볼 자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설계하고 나아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꾼이 되게 한다는 취지로 2016년 강화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를 베이스 캠프로 개교한 기숙형 대안학교.
마지막으로 활동가들에게 한마디 전하신다면요?
만나야 될 때 만나면 좋겠어요. 오시는 분들 중에는 혼자 버티고 버티다 너무 힘든 때를 지나서 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어떠한 마음의 상처는 점점 커지기도 하거든요. 그냥, 힘들면 바로 <뜻밖의 상담소>를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상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해요. 활동가 심리지원은 계속해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체계이고 활동을 해나가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하는 일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우리 사회의 응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뜻밖의 상담소> 오는 길. 약수역 4번 출구에서 나와 직진 150미터 후 사진 속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보인다. (사진 : 김지연)
즐거운 생활을 부탁해
<활동가인터뷰> 제목을 위해 “나를 설명하는 형용사”를 물었더니 자신을 설명하는 게 어렵단다. 자신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너무 많은 형용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식물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며 새로운 말문을 연다. “자유롭고 싶다.” 아마도 정서적 자유를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학을 가지 않았을까?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싶어서 회사에 갔고, 관심 있는 대상과 작업들로 자유하고 싶어서 회사를 나왔단다. 몸이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다며 체력을 걱정하다 말고는 <지구를 걷는 여행> 프로그램을 해 보고 싶단다. “원하면 얻을 때 까지 하는”, “간절하게 찾은 것 같고, 간절하게 찾아가고 있는”, 또박또박 거기로 가게 하는 “집요함”이 더듬더듬 온 몸으로 땅을 쓸며 걸어 나가는 “달팽이”를 닮아있어 사랑, 감사, 존경, 연민이 올라온다. 그러니 “즐거운 생활은 여전히 초보의 영역이라 그런 시간을 더 만들어주고 싶다.”는 그녀에게 그림 한장을 선물로 건네본다. 번쩍번쩍 미러볼을 등에지고 둠칫둠칫 춤추듯 달려가는 달팽이를.
(그림 : 지윤)
※ 본 인터뷰는 <더이음>의 활동가 인터뷰 일환으로, 글쓴이 최지윤님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 https://activistweek.net/interview/?idx=3819048&bmode=view
“자유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 _ 신영복 <처음처럼> 중에서
아지트가 있는 약수로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이는 어느 일요일 오후. <어쩌면사무소>로 향한다. 작년에 <더이음>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마음돌봄 워크숍을 진행한 김지연 상담심리사를 만나러 가는 길. 약속시간이 조금 남아 바로 앞 작은 공원에 앉아 햇볕을 쬐며 멍하니 바람을 맞는다. ‘아~좋다!’ 금세 약속시간. 첫 만남이 주는 설레임을 안고 활짝 열린 문안으로 들어선다.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탁자위에는 싱그러운 딸기샐러드가 놓여있고 그 옆에 각자 지금 딱 마시고 싶은 음료 두 잔이 향긋하게 놓인다. 몸이 기대고 있는 의자는 든든하고 공간은 아늑한데...뭔가 이상하다. 그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걸으면서 인터뷰 할까요?” ‘아차!’ 인터뷰라는 업무에 집중한 나머지 이제 막 상담을 마치고 여운이 남아있을 그녀를 놓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가 먼저 과감하게 산책을 제안해 준 덕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을 풀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만남을 이어간다.
어쩌면 사무소 전경. 앞으로 <뜻밖의 상담소>로 불릴거예요 (사진 : 김지연)
연결은 역시 <시골살이학교>
더이음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을까요?
<시골살이학교>* 출신입니다. 5~6년 전쯤? ‘서울에서의 삶을 유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고 ‘다른데서 살아보는건 어떨까?’ 생각하던 와중에 알게 됐어요.
꿀맛이었던 시골살이학교 새참시간 (사진 : 김지연)
시간이 좀 흘렀는데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회사를 그만 뒀어요. 그때는 회사 생활을 접고 살아 갈 수 있을지 불안 했어요. 시골살이학교에서 만난 동기들 덕분에 뭔가를 만든다든지, 배운다든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됐던 거 같아요. “나도!” 하고 바로 뛰어든 건 아니고요. 이제까지는 직장 다니는 삶만 떠올렸다고 한다면, 회사 밖에서도 살 수 있겠다는 다른 가능성을 본 정도였어요. (그녀는 삼성전자 Life Coaching센터 전문상담사와 LG상사 심리상담실장 이력을 갖고 있다.)
비공식 또래상담이 떡잎이 되어
상담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어떤 측면을 얘기 하느냐에 따라 많은 얘기가 가능할 텐데요. 중학교 때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우연히 책을 통해 이 분야를 자세히 알게 됐어요. 『딥스: 자아를 되찾은 아이』라고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던 자폐아이의 치료 과정을 다룬 소설인데 인상적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때만해도 이 일이 직업으로 어떻게 연결될지는 알 수 없었어요. 심리학과가 있는 지도 몰랐고, 정보가 없었거든요. 이과생이었기 때문에 성적에 맞춰 취업이 잘되는 공대에 들어갔어요. 한창 스마트폰이 막 나올 때라 전자공학과는 빨리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고 취업이 결정된 이후 1년반 정도 듣고 싶은 과목을 들으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요. 그래서 평소 관심있던 심리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너무 재밌는거에요. 고민을 했죠. 주변에 진로를 바꿔보고 싶다고 이야기 했더니 학창시절 친구들이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학교 뒷산에서 야자 빼먹고 벤치에 앉아 친구들 고민을 많이 들어줬다면서요. 그러고 보니까 그랬더라고요. 그래서 1년 반동안 집중적으로 부전공을 후다닥해서 상담심리대학원으로 진학했고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어떤 분야의 상담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처음부터 성인상담에 관심이 있었어요. 학기 초에 교수님께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스포츠 선수를 상담하고 싶다고 했어요. 어느 구단에서 유망한 투수가 과도한 훈련으로 어깨가 나가는 일들이 있었는데 너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외국에서는 무리한 방식의 훈련이 아니라, 멘탈 관리를 포함한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야구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자기의 기량을 더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코치나 상담사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아예 없었어요. 일상 생활을 하는 성인에게 관심이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취업 준비할 때도 일반 회사에 지원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사회생활을 기업에서 시작하셨네요?
상담사들이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 처우가 굉장히 낮아요. 수련 과정에는 무급이거나 되려 돈을 내면서 하기도 하고요. 저는 사정상 졸업을 하면서는 완전히 독립을 해야했어요. 졸업하고도 전문가 자격을 따려면 4~5년 동안 꽤나 비용이 드는데 스스로 벌어서 하려면 보상이 중요했어요. 마침 그때 기업에서 심리상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람을 뽑기 시작했을 때였고, 기업 상담에 대한 저의 관심과 니즈가 잘 맞아 기업으로 가게 되었어요.
뭔가 착!착! 해 오신 것 같아요?
‘이걸 하고 나면 다음에 뭐를 하지?’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항상 두 가지 일을 하면서 꽉꽉 채워서 살았어요. 대학원 다니면서 과외하고, 논문 쓰면서 취업하고. 그러면서 시기에 맞게 해오긴 했지만 여러가지를 다양하게 경험하진 못했어요. 축제, 엠티, 동아리... 인간 관계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시기였는데 별로 못 즐겼거든요. 그때는 독립해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두 번째 직장을 다니면서 분석을 2년 정도 받았는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알게 됐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 둘 때는 분명한 상태로 결정할 수 있었어요. 물론 고민한 시간은 길었지만요. 지금은 불안정한 생활이지만 내가 얻고 있는 것에 좀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상담하는 활동가들을 만나다.
퇴사는 어떤 마음으로 결정하셨나요?
어릴때부터 아는 어머니 친구분이 있어요. 그 분이 오랫동안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먼저 보내드리고 남은 삶은 좀 편하게 살려고 밀양으로 이사를 갔는데 밀양 송전탑 사건이 터진 거에요. 그 마을에서는 젊은 사람이고, 신앙 생활을 오래 해오셔서 앞장 서서 싸우게 됐는데 힘드셨던 모양이에요. 잠도 못 주무시고 악몽도 꾸고 화도 많이 내게 되고... 그러면서 몸도 아프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제 기억속에서는 늘 쾌활했던 분인데, 이제 마음 편하게 살자고 시골로 갔는데 도대체 무슨일인가?’하고 걱정이됐어요. 마음만 동동 구르고 있었죠. 방법이 없을까하고.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하는 친구가 말하길, 자기 친구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며 치유 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하는데 와서 봐 달라는 거에요. 그 때 시작한 프로그램이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였어요. 정혜신 선생님을 처음 만났고 싸움의 현장에서 치유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엄마 친구 얘기를 했더니 <와락>**에서 치유활동 하시는 분들을 만나보라고 해서 갔고 거기서 와락치유단 선생님들을 만나게 됐어요.
치유는 상담실 밖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진 : 김지연)
와락치유단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심을 가지고 해고자 심리 치유를 해온 상담자, 치유자 그룹입니다. 와락치유단 선생님 중 한 분은 대한항공에서 부기장을 하다가 노조를 만들어서 해고당하고 상담 공부를 시작하신 분이기도 해요. 와락치유단 선생님들을 통해서 문제의식이 분명해졌어요. 마음건강은 개인이 감당하고 책임져야하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건강을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 목소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요. 치유자로서 상담을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병을 유발하는 불합리한 구조나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틈틈히 와락치유단 선생님들 연대에 따라다니다 저도 와락치유단 일원이 되었어요. 회사를 나오면서는 와락치유단에 오현정 선생님 등 몇몇 상담사 분들이랑 서울시 협치 <IT노동자 및 사회활동가 청년을 위한 심리지원>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퇴사해도 계속 일은 해온 셈이에요.
조금씩 자기다워지는
어떤 것을 얻고, 집중하고 있나요?
큰 시스템에 있으면 맞춰야 되는 게 많은데 내 속도,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것에 맞는 삶을 디자인 해 보고 있어요. 아침 잠이 많아 출근시간 맞추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상담시간은 제가 잡기 나름이잖아요. 요즘엔 오전 11시 상담도 빠른 편이에요. 시간을 유용할 수 있다보니 하고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많이 해 보게 됐고요. 사람도 내가 편안한 관계 위주로 만나고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내가 편하니까 상담도 더 잘 되는 거 같아요.
잘 누리고 계신가요?
일을 벌리는 성격이라 제작년 서울시 협치 사업을 할 때는 숨가쁘게 느끼기도 했었어요. 프리랜서로 일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중이에요. 너무 일을 많이 벌리려고 할 때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예전에는 혼자 했다면 이젠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기도 하고요. 갑자기 잘 누리게 되었다던가 삶의 질이 높아졌다기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겪으면서 배우는 사람인 것 같아요. 해 보면서 팀작업 하는 것의 어려움이라던지,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가 맞지 않는다던지, 나에게 어떠한 한계가 있는지 등등 알아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나에게 무리인 건 정리하기도 하고요.
놓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죠?
괴로워서 놓기도 하고, 죽을 것 같아서 놓기도 하고요. 용기라고 말하니 대단해보이지만 자세히보면 ‘좌절감이 들어서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에요.
그냥 그렇게 과로사하기도 하죠. 생명을 놓기도 하고, 정서를 놓기도 하고, 소중한 걸 놓기도 하고.
상담사라는 직업은 나의 상태가 괜찮지 않으면 일을 못하니까요. 다른 사람 얘기가 귀에 잘 안들린다고 느껴질 때는 일을 쉬어요. 일을 시작할 무렵 한번 그랬던 적이 있는데 제 일상에 격동이 있다보니 듣는 일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 일을 하려면 나를 보호하는게 최우선일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떤 방식이 나에게 괜찮은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고 좋아지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어요.
상담과 교육의 교집합
그런 측면에서 보면 상담사는 행운이네요. 사람이 먼저인 것이 곧 일이 되잖아요. 모두가 자기상태를 최우선에 두는 게 당연한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맞아요. 상담 공부는 나를 계속해서 생각해야해요. 저는 분석을 받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지 그 전에는 몰랐어요. 자기 표현을 잘 못했고, 나를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일찍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10대 때 배웠으면 내 삶이 달라졌을텐데 아쉬울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점점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어려서부터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내 목소리가 인정되는 경험이 중요하니까요. <꿈틀리>*를 통해 알게된 덴마크식 교육이 매력적이었는데요. 학교 수업 시간에 계속 자기 표현을 해요. 짝을 지어서, 몸을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내가 어떤지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들으면서 구체적으로 대화해나가요. 덴마크에서는 10대 중반이 되면 국제정세에 대한 자기 견해나 어떤 사건에 대해 내 생각을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데요. 지식을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 할 수 있는 훈련이 된 것이지요. 내 생각, 내 감각, 내 방식을 말할 수 있고 존중받는 경험을 해서 가능한거지 싶어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한 달 간 지내다 오셨죠?
그러다 성인들을 위한 덴마크식 인생학교 <자유학교>**를 열게되었고, 그로 인해 인연이 생긴 국내 유일한 덴마크 전문 언론사 <NAKED DENMARK>***에서 <코펜하겐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진행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야기하다보니 프로그램 취지와 회사의 가치가 참 좋았어요. 단지 ‘덴마크가 좋다’라고 알리면서 환상을 파는 것을 지양하고, 한국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덴마크를 경험해본다는 취지가 맘에 쏙 들어서 가기로 결정했어요. 그쪽에서도 첫 프로그램이었다보니 아이디어도 보태고 참가자의 목소리에 맞게 수정도 해가면서 잘 다녀오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글로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코펜하겐 한 달 살기> 경험을 글과 모임으로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부터 8주간 덴마크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소개하는 글 “어쩌면, 덴마크: 신뢰가 준 선물”을 온라인으로 배달하고 있으며 구독자들과 함께 지금, 여기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보는 오프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사진 : 김지연)
활동가들과 함께
작년에 이곳에서 활동가들을 만나셨는데 어떠셨나요?
활동가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면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약하고 소외된 곳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싸워나가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를 치유해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활동하면서 마음이 손상될만한 일들이 많아요. 폭력적인 상황을 매일 보고 듣고 지원하면서 대리외상을 입거나, 때로는 혐오세력에 의해 직접 신체적인 폭력 또는 언어적인 폭력을 경험하고요. 외부적인 영향 뿐 아니라 ‘활동가라면 이런 걸 지켜야 돼. 이 정도는 견뎌야 해.’ 하며 스스로에게 압력을 주기도 해요.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해오신 분들은 소진이 오기도 하고요.
제가 가진 심리 지식을 나누고 싶었어요. 나를 돌보고, 몸을 이완시키고, 마음을 이해하고 대화해나가는 기술이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나게 되었죠. 짧게는 한두번 길게는 몇년간 심리적인 지지자로 만나고 있어요. 다들 자기만의 이유로 활동을 지속해나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데요. 그 과정을 함께 하고 있어요.
그녀와 만나고 싶다면
올해는 어떤 활동이 기다리고 있나요?
다음세대재단에 지원서를 제출했어요. 인권활동가를 위한 심리지원으로요. 회사 상담실에는 단계별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이 있어요. 신입사원들은 회사생활을 예상해볼 수 있는 영상을 보고 미리 어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지, 나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요. 간단한 이완 기술과 같은 스트레스 대처법도 배우지만 동기들끼리 서로 마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도록 관계도 형성하는 셈이에요. 입사한지 1년 정도 후에는 회사 다니면서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다시 가집니다. ‘스트레스 관리’ 또는 ‘적응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데, 중요한건 각 부서에서 동떨어져서 일에만 매몰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마음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고 연결시켜주는거에요. 일하는 정체성 뿐 아니라 다른 면면들을 만나고 이해하면서 회사생활의 삶의 질을 높이고 협업도 더 잘 이루어지도록 해요.
그 밖에 해외부서로 파견 나가기 전, 후 마음건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팀 단위에서 갈등이 있을 때 상호 이해를 돕는 심리워크숍을 하기도 하고요. 큰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연말에도 서로를 격려하고 관계 형성을 돕는 심리워크숍을 가져요.
활동가에게도 이러한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공익활동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대해 편하게 물어보고 이용 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해서 오현정 선생님, 이지연 선생님과 같이 <뜻밖의 상담소> 이름으로 지원서를 제출했어요. 여기를 기반으로 시작해서 마음 맞고 뜻맞는 상담사들도 더 함께하고 싶고요. 공익변호사 단체처럼 나중에는 그런 기관이 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요즘 위기 청소년들이 많아 대안학교들도 고민이 많아요. 제작년부터 <꿈틀리 인생학교>* 선생님들이랑 위기 청소년을 돕기 위한 공부를 해오고 있어요. 마음의 병에 대한 공부도 하고,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만들기 위한 준비도 하고요. 선생님들이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 어떤 반응은 하면 안되는지, 학교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등 같이 이야기해나가고 있어요. 올해부터는 학생들을 직접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활동가들에게 한마디 전하신다면요?
만나야 될 때 만나면 좋겠어요. 오시는 분들 중에는 혼자 버티고 버티다 너무 힘든 때를 지나서 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어떠한 마음의 상처는 점점 커지기도 하거든요. 그냥, 힘들면 바로 <뜻밖의 상담소>를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상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해요. 활동가 심리지원은 계속해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체계이고 활동을 해나가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하는 일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우리 사회의 응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뜻밖의 상담소> 오는 길. 약수역 4번 출구에서 나와 직진 150미터 후 사진 속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보인다. (사진 : 김지연)
즐거운 생활을 부탁해
<활동가인터뷰> 제목을 위해 “나를 설명하는 형용사”를 물었더니 자신을 설명하는 게 어렵단다. 자신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너무 많은 형용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식물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며 새로운 말문을 연다. “자유롭고 싶다.” 아마도 정서적 자유를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학을 가지 않았을까?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싶어서 회사에 갔고, 관심 있는 대상과 작업들로 자유하고 싶어서 회사를 나왔단다. 몸이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다며 체력을 걱정하다 말고는 <지구를 걷는 여행> 프로그램을 해 보고 싶단다. “원하면 얻을 때 까지 하는”, “간절하게 찾은 것 같고, 간절하게 찾아가고 있는”, 또박또박 거기로 가게 하는 “집요함”이 더듬더듬 온 몸으로 땅을 쓸며 걸어 나가는 “달팽이”를 닮아있어 사랑, 감사, 존경, 연민이 올라온다. 그러니 “즐거운 생활은 여전히 초보의 영역이라 그런 시간을 더 만들어주고 싶다.”는 그녀에게 그림 한장을 선물로 건네본다. 번쩍번쩍 미러볼을 등에지고 둠칫둠칫 춤추듯 달려가는 달팽이를.
(그림 : 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