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삶에서 생존자인 ‘나’들에게
_ 유경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첩첩산중의 기숙사 학교를 다니면서도 매주 주말마다 서울에 가서 모임에 참석했고, 겨우 서둘러 7시 30분의 막차를 잡아타고도 캄캄한 시골길을 1시간은 더 걸어야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부조리함에 점점 막막해지는 학교 생활을 이어가는 데에 그 주말마저 없었다면 아마 곱절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졸업을 하고는 곧장 상근 활동가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졸업한 학교가 대안학교였는데, 졸업을 하자마자 무엇이 되었던 ‘일’을 시작한 경우는 동기들 중 나뿐이었다. 동기들은 막막한 졸업 이후 곧장 할 일을 찾은 나를 부러워했다. 나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많지는 않지만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시민단체의 사무실은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창립 과정부터 함께해 온 단체와 활동가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그동안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지 않았던 내게는 커다란 발견이고 마음이었다.
그러던 2020년 여름, 나는 탈가정을 했다. 친권자의 가정폭력 때문이었고, 에코백 하나만을 챙겨 나와 꼬박 세 달간을 친구의 집, 가까운 시민단체의 사무실을 전전하며 살았다. 사실 그 때의 나는 내가 불안정한 상태인지도 몰랐다. 그저 거처와 옷가지를 챙겨주는 친구와 동료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표해야 했고, 또 내일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치열히 고민해야 했다.
집을 나온 다음 날엔 내가 담당자로 속해있던 연대체의 워크샵에서 발제를 했다. 연대체 내에서 있던 나와 같은 ‘당사자 활동가’를 조직이 살피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응답하는 자리였다. 전날 친권자와 몸싸움을 하며 잔뜩 긴장했던 몸엔 손가락 까딱하는 것도 힘들만큼 근육통이 심했다. 자리에서는 다른 입장들이 대립했고,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 빙빙 돌았다. 아픈 몸을 붙잡고 앉아있던 그때만큼 활동과 내 삶이 멀리 떨어져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모두에게 힘들었겠지만,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내가 힘들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가장 각광 받던 이슈의 당사자였다. 매일매일 인터뷰 전화를 받고, 방송에 나가고, 영상을 찍었다. 처음에야 내가 말하는 것만으로 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일이 마냥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쩔 수 없는 허무감이 밀려왔다. 매일매일 인터뷰를 하면서도 점점 방송에 나갈만한 말만을 골랐고, 내가 이 사안에 대해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 쓸모라는 게 해당 이슈의 ‘당사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게는 기분과 경험만을 물으면서, 나이와 경력이 있는 비청소년 활동가에게는 전망과 생각을 묻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활동가가 아닌 당사자로만 기입해도 되냐는, 스무 살인데 대학을 왜 안 갔냐는 기자의 사소한 물음도 반복되니 힘이 들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에는 집에 가는 지하철에 앉아 엉엉 울었다.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기는 나에게 흉터처럼 남았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어느 날, 나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이후 나는 이 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했다. ‘당사자성’ 외의 쓰임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들을 다른 외부 프로젝트들에 참여함으로써 해소했고, 매달 있는 사무처 회의에서는 툭하면 이 이야기를 하다 울곤 했다. 동료는 나에게 사무처 업무에 집중하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주었고, 나는 내가 왜 외부 프로젝트들에 골몰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역량에 비해 벌인 일이 많으니 여러 프로젝트에서 자연히 해내는 것들이 줄어들었다. 여전히 그 감각에서,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또다시 ‘극복’하지 못했다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두려움으로 나를 몰고 갔다. 여러모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이 엉망진창에 끝은 없었다, 나는 이 일을 끝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 시기로부터 1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활동가의 마음 돌봄을 목적으로 한 3회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활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돌보기까지 할 활동가 마음이 있나 싶기도 했다. ‘활동가가 아닌’ 그저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하고 싶어 신청한 상담이었다. 하지만 활동가로서의 이야기들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툭하고 튀어나왔다. 활동과 삶이 온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그 시기에 대해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며 나는 언젠가 이렇게 이야기할 순간을 기다려왔구나, 생각했다.
상담에서 나는 두서없이 내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두었다. 첫 상담 때는 몇 번이나 반복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또 다시 울었고,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다는 상담사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내 생각과 마음들을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담에서 가장 위로가 되었던 말은 내가 ‘생존자’라는 이야기였다. ‘생존자’라는 호명은 내가 왜 그 시간에서 벗어나질 못하는지에 대한 책망 대신에 그래, 그럼에도 나는 살아낸 거지, 라는 마음을 주었다.
내가 겪었던 불안정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교훈도 드라마틱한 해결도 없다. 상담도 병원도 모든 걸 해결해주지도, 해결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돌보는 법에 대해 모르고, 이 속에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뾰족한 가시들이 숨어있다. 하지만 나는 살아냈다. 그 힘겹고 불안한 시간들을 어떻게든 건너왔고, 여전히 건너고 있다. 영화 <벌새>의 영지 선생님의 말처럼, 손가락을 쭉 펴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 시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등바등 속에서도 살아낸 순간들을 되짚으며, 내 생존에 인정과 감사를 보내주고 싶기도 하다. 막연하지만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뻔한 말을 믿어보기로 하는 것이다.
3월에는 제주도로 며칠 간 홀로 여행을 떠난다. 모쪼록 이리저리 상처 입으며 굴러다녔던 내 몸과 마음에게 충분한 쉼과 돌봄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생존해나가고 있는 생존자들에게, 마음 속 가장 따뜻하고 온전한 온기를 전하고 싶다.
각자의 삶에서 생존자인 ‘나’들에게
_ 유경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첩첩산중의 기숙사 학교를 다니면서도 매주 주말마다 서울에 가서 모임에 참석했고, 겨우 서둘러 7시 30분의 막차를 잡아타고도 캄캄한 시골길을 1시간은 더 걸어야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부조리함에 점점 막막해지는 학교 생활을 이어가는 데에 그 주말마저 없었다면 아마 곱절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졸업을 하고는 곧장 상근 활동가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졸업한 학교가 대안학교였는데, 졸업을 하자마자 무엇이 되었던 ‘일’을 시작한 경우는 동기들 중 나뿐이었다. 동기들은 막막한 졸업 이후 곧장 할 일을 찾은 나를 부러워했다. 나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많지는 않지만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시민단체의 사무실은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창립 과정부터 함께해 온 단체와 활동가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그동안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지 않았던 내게는 커다란 발견이고 마음이었다.
그러던 2020년 여름, 나는 탈가정을 했다. 친권자의 가정폭력 때문이었고, 에코백 하나만을 챙겨 나와 꼬박 세 달간을 친구의 집, 가까운 시민단체의 사무실을 전전하며 살았다. 사실 그 때의 나는 내가 불안정한 상태인지도 몰랐다. 그저 거처와 옷가지를 챙겨주는 친구와 동료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표해야 했고, 또 내일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치열히 고민해야 했다.
집을 나온 다음 날엔 내가 담당자로 속해있던 연대체의 워크샵에서 발제를 했다. 연대체 내에서 있던 나와 같은 ‘당사자 활동가’를 조직이 살피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응답하는 자리였다. 전날 친권자와 몸싸움을 하며 잔뜩 긴장했던 몸엔 손가락 까딱하는 것도 힘들만큼 근육통이 심했다. 자리에서는 다른 입장들이 대립했고,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 빙빙 돌았다. 아픈 몸을 붙잡고 앉아있던 그때만큼 활동과 내 삶이 멀리 떨어져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모두에게 힘들었겠지만,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내가 힘들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가장 각광 받던 이슈의 당사자였다. 매일매일 인터뷰 전화를 받고, 방송에 나가고, 영상을 찍었다. 처음에야 내가 말하는 것만으로 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일이 마냥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쩔 수 없는 허무감이 밀려왔다. 매일매일 인터뷰를 하면서도 점점 방송에 나갈만한 말만을 골랐고, 내가 이 사안에 대해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 쓸모라는 게 해당 이슈의 ‘당사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게는 기분과 경험만을 물으면서, 나이와 경력이 있는 비청소년 활동가에게는 전망과 생각을 묻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활동가가 아닌 당사자로만 기입해도 되냐는, 스무 살인데 대학을 왜 안 갔냐는 기자의 사소한 물음도 반복되니 힘이 들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에는 집에 가는 지하철에 앉아 엉엉 울었다.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기는 나에게 흉터처럼 남았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어느 날, 나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이후 나는 이 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했다. ‘당사자성’ 외의 쓰임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들을 다른 외부 프로젝트들에 참여함으로써 해소했고, 매달 있는 사무처 회의에서는 툭하면 이 이야기를 하다 울곤 했다. 동료는 나에게 사무처 업무에 집중하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주었고, 나는 내가 왜 외부 프로젝트들에 골몰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역량에 비해 벌인 일이 많으니 여러 프로젝트에서 자연히 해내는 것들이 줄어들었다. 여전히 그 감각에서,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또다시 ‘극복’하지 못했다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두려움으로 나를 몰고 갔다. 여러모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이 엉망진창에 끝은 없었다, 나는 이 일을 끝내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 시기로부터 1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활동가의 마음 돌봄을 목적으로 한 3회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활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돌보기까지 할 활동가 마음이 있나 싶기도 했다. ‘활동가가 아닌’ 그저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하고 싶어 신청한 상담이었다. 하지만 활동가로서의 이야기들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툭하고 튀어나왔다. 활동과 삶이 온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그 시기에 대해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며 나는 언젠가 이렇게 이야기할 순간을 기다려왔구나, 생각했다.
상담에서 나는 두서없이 내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두었다. 첫 상담 때는 몇 번이나 반복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또 다시 울었고,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다는 상담사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내 생각과 마음들을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담에서 가장 위로가 되었던 말은 내가 ‘생존자’라는 이야기였다. ‘생존자’라는 호명은 내가 왜 그 시간에서 벗어나질 못하는지에 대한 책망 대신에 그래, 그럼에도 나는 살아낸 거지, 라는 마음을 주었다.
내가 겪었던 불안정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교훈도 드라마틱한 해결도 없다. 상담도 병원도 모든 걸 해결해주지도, 해결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돌보는 법에 대해 모르고, 이 속에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뾰족한 가시들이 숨어있다. 하지만 나는 살아냈다. 그 힘겹고 불안한 시간들을 어떻게든 건너왔고, 여전히 건너고 있다. 영화 <벌새>의 영지 선생님의 말처럼, 손가락을 쭉 펴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 시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등바등 속에서도 살아낸 순간들을 되짚으며, 내 생존에 인정과 감사를 보내주고 싶기도 하다. 막연하지만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뻔한 말을 믿어보기로 하는 것이다.
3월에는 제주도로 며칠 간 홀로 여행을 떠난다. 모쪼록 이리저리 상처 입으며 굴러다녔던 내 몸과 마음에게 충분한 쉼과 돌봄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생존해나가고 있는 생존자들에게, 마음 속 가장 따뜻하고 온전한 온기를 전하고 싶다.